[하인수 박사의 조선왕릉 이야기] 11. 조선왕릉 단종의 장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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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 장릉 전경.(궁능유적본부) 단종은 조선 5대 왕 문종과 현덕왕후 권씨의 아들로 1441년(세종 23)에 태어났다. 그런데 단종이 태어난 하루 뒤 현덕왕후가 산후병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기구한 인생이 시작된다. 1448년(세종 30) 8세에 세손으로, 1450년 10세에 세자로 책봉되고, 2년 후에 아버지 문종이 승하 하자 1452년 12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단종은 3년의 재위 기간에 숙부 수양대군에 의해 1457년(세조 3) 6월 강원도 영월로 유배를 갔고 10월 유배지인 영월 청령포에서 죽임을 당했다. 단종 죽음과 관련된 실록의 기록은 찾아보기 힘들다. 이에 타살되었다. 사약을 마셨다. 자결을 하였다. 시신을 동강에청약예금 및 청약부금
버렸다. 시신을 길가에 버렸다. 등의 실체가 밝혀지지 않는 야사(野史)가 전해진다. 야사의 대표적인 이야기가 단종을 낳고 산후병으로 죽은 현덕왕후의 세조에 대한 저주이다. 야사에는 시동생인 세조 꿈에 나타나 네가 내 아들을 죽였으니 나도 네 아들을 죽이겠다며 세조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실제는 세조의 맏아들 의경세자는 단종보다 두 달여갤럭시탭거치
전에 사망하였다. 따라서 단종 어머니 현덕왕후의 저주는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아마 아들 단종의 억울한 죽음에 한을 품을 어머니 현덕왕후의 마음을 헤아려 민초들의 동정심이 보태져 구전으로 전해진 것이라 생각된다. 단종 어소. 정부대출기관
노산군의 유배지 청령포는 삼면이 강[서강]이다. 나머지 한 면은 험준한 바위 봉우리인 육육봉이다. 외부와 철저히 차단되어 유배지로는 제격이다. 단종이 머문 단종어소 입구의 소나무는 담을 넘어 마당 한가운데까지 가지를 뻗었다. 어린 임금 앞에 엎드려 절하는 듯한 모습이다. 솔숲엔 국내 소나무 중 가장우리v체크카드 통신비
키가 크다는 30m의 천년기념물인 관음송(觀音松)이 서 있다. 단종의 유배 생활을 지켜보고[觀] 단종의 절규를 들었다[音]고 '관음송'이라 이름 지어진 수령 600여 년의 노송이다. 솔숲 뒤편 육육봉과 한양을 바라보며 시름에 잠겼다는 노산대(魯山臺) 사이에는 단종이 아내를 그리며 쌓았다는 망향탑이 있다. 유배 며칠 뒤(7월 3일) 순흥부사(현 경북영주) 국민은행 신용대출 서류
이보흠의 밀고로 경북 영주에 머물던 세종의 6남인 숙부 금성대군의 단종 복위 시도가 발각되고, 단종에게도 사약이 내려진다. 금성대군 단종 복위 시도가 단종 사사의 직접적인 이유가 되었다. 1457년, 10월 21일(세조 3)의 조선왕조실록에는 송현수(宋玹壽)는 교형(絞刑)에 처하고, 나머지는 논하지 말도록 하였고, 노산군이 자살하자 예로써 장사 지냈다고 기아파트전세담보대출조건
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후 실록의 기록에는 내용이 다르다. 단종 복위 1년 후인 1699년, 1월 2일(숙종 25)의 조선왕조실록(숙종실록 33권)에는 숙종이 하직하는 영월 수령에게 '단종 대왕(端宗大王)이 영월(寧越)에 피하여 계실 적에 금부도사(禁府都事) 왕방연(王邦衍)이 고을에 도착하여 머뭇거리면서 감히 들어가지 못하였고, 정중(庭中)에 입시(入侍)하연말정산식대
였을 때에 단종 대왕께서 관복(冠服)을 갖추고 마루로 나아오시어 온 이유를 하문하셨으나, 왕방연이 대답하지 못하였었다. 그가 봉명신(奉命臣)으로서도 오히려 그러했는데, 그때 앞에서 늘 모시던 공생(貢生) 하나가 차마 하지 못할 일을 스스로 하겠다고 자청하고 나섰다가, 즉시 아홉 구멍으로 피를 쏟고 죽었다.'고 하였다. 도시지하철
단종 장릉 후면. 단종 복위 운동의 주동자인 세조의 동생 금성대군도 노산군이 사사된 한 달 뒤에 사사되었다. 이때 세조 일당들의 눈을 피해 시신을 수습한 이가 영월 호장(지금의 읍장) 엄흥도다. 그는 밤중에 다른 사람들의 눈을 피해 국민은행 청약저축
아들들과 함께 영월 인근 동을지산 자락에 단종을 묻는다. 그리고 후환이 염려되어 가족을 데리고 야밤에 도주를 했다. 단종의 장릉은 조선왕릉 가운데는 유일하게 서울이나 경기도가 아닌 곳에 있는 능이다. 단종이 정식으로 복권되어 왕릉을 이장하기 위해 조정에서 지관을 내려보냈는데 살펴보니 엄흥도가 단종을 묻은 그 자리가 이미 명당이었기에 한양 근처로 천릉하지 않주택담보대출비율
았다고 전해진다. 엄흥도는 당시는 호장(戶長)으로 지금의 읍장 또는 면장의 직위에 해당하며 지역의 지리 특성을 제대로 알았고, 풍수에도 상당한 식견이 있는 이로 생각된다. 당시 서슬 퍼런 세조의 눈을 피해 암장했던 만큼 단종의 무덤에 아무도 관심이 없었다. 묘 조성 85년 후인 1541년(중종 36)에 노산군의 무덤을 찾으라는 명을 받고 수소문했으나 찾을 수 없어 난감해하던 차에 영월군수 박충원이 발견하여 묘소를 정비하게 되었다. 이후 1580년(선조 13)에 주변에 비석들이 세워지기는 했으나 이 당시까지 노산군으로 강등되었던 상태여서 묘(墓)라는 칭호를 유지해 오다가 사사 241년 후인 1698년(숙종 24) 11월, 숙종이 단종을 복위시킴에 따라 묘에서 능으로 격상되고 능호도 장릉이라 하였다. 장릉은 다른 왕릉과는 달리 석물과 공간구성에 특이한 점이 많다. 난간석이 없고, 망주석에 세호(細虎)가 없으며, 무인석이 없다. 청령포(단종 유배지). 청령포 맞은편 강변 언덕에는 사약을 가져왔던 금부도사 왕방연이 단종 사사 후 한양으로 돌아가는 길에 비통한 심정으로 읊었다는 시가 새겨진 시비(詩碑)가 있다.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 님 여의옵고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저 물도 내 안 같아서 울어 발길 예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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