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인수 박사의 조선왕릉 이야기] 10. 조선왕릉 현릉-비운의 주인공이 된 현릉(顯陵)과 소릉(昭陵)

[하인수 박사의 조선왕릉 이야기] 10. 조선왕릉 현릉-비운의 주인공이 된 현릉(顯陵)과 소릉(昭陵)

[하인수 박사의 조선왕릉 이야기] 10. 조선왕릉 현릉-비운의 주인공이 된 현릉(顯陵)과 소릉(昭陵)

Blog Article

현릉 전경(궁능유적본부) 현릉은 조선 5대 문종과 현덕왕후 권씨의 능이다. 현릉은 같은 능역에 하나의 정자각을 두고 서로 다른 언덕에 능침을 조성한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의 형태이다. 7세에 세자로 책봉되어 조선왕조 중 세자 재직 기간이 가장 긴 무려 30년 동안 세자 자리에 있었던 문종은 생전 아버지 세종의 구 영릉(서울 내곡동 헌릉 서쪽) 근처에 묻히기를 원했다. 재위 2년 만인 1452년(문종 2) 승하하자 문종의 뜻대로 내곡동인 이목동(梨木洞) 자리로 정하자 현덕왕후의 소릉 택지 시 반대 상소를 올렸던 풍수가 목효지가 이번에는 단종에게 쪽지[小簡]를 올려 이 땅은 주인은 약하고 객이 강한 땅이며, 정룡(正龍)과 정혈(正穴)이수영 감우성
아니니 쓸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수양대군을 중심으로 목효지 의견을 묵살하고 영릉의 남쪽을 정하고 능을 조성하고자 한다. 9척쯤 파니 물이 나와 택지를 옮겨 영릉 서쪽을 파니 이번에는 돌이 나와 어쩔 수 없이 수양대군(세조), 황보인, 김종서, 정인지 등 대신과 풍수지관이 동구릉 현지를 답사하고 현재 건원릉 남동쪽에 현릉을 조성하였다. 일본닛케이
현덕왕후릉(후면) 현덕왕후는 문종이 세상을 떠나기 11년 전에 왕세자빈 신분으로 1441년 7월(세종 23)에 세상을 떠나 경기도 안산 바닷가 와리산 자락에 왕세자빈묘의 형태로 조성하였다. 세자빈[현덕왕후]마랑 원피스
이 단종 탄생 1일 만에 사망하자 장지를 두고 논쟁이 벌어지는데 택지 논쟁의 중심에 관청의 종[奴] 목효지(睦孝智)가 있었다. 목효지는 임금에게 상소를 올릴 정도였다면 단순한 노비가 아니라 학문이 높았다고 볼 수 있고, 원래는 양반 가문 출생이지만 어떤 이유인지 외눈의 노비가 되었다. 결과론적으로 단종의 미래를 예언한 조선의 풍수가였다. 최양선 주도하에 택창원한국주택공사
지된 터에 목효지가 상소에 지적한 문제점은 첫째, 주산에서 혈장으로 이어지는 내룡(來龍)이 얕고 약하며, 길로 인해 끊어진 곳이 많아 후손이 없을까 두렵다. 둘째, 재혈(裁穴) 부분으로 건해입수, 계좌정향에 사방(巳方)이 수파(水破)로 장생(長生)에 해당되어 모두 절멸(絶滅)한다. 셋째, 천관혈(天關穴)을 범하여 사내와 어른이 죽는다. 넷째, 청룡이 물과 신용보증기금대출조건
함께 달아나 어른을 죽인다. 다섯째, 고현(古縣)은 산가에서는 꺼린다는 것이었다. 즉 이 터는 흉악한 땅이라고 한 것이다. 특히 생왕방(生旺方)을 유파(流破)하면 후손이 끊기어 없어져 모두 절멸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대신들은 목효지의 상소에 대해 반박하였고, 세종은 다섯 가지 문제에 대해 염려스러운 것은 고현이라는 것과 파도 소리라 하며 장혈[혈자리]을 자녀교육비마련
목효지 주장대로 고쳐 정하고, 그 자리로 결정하고 왕세자빈묘를 조성하였다. 그리고 문종이 즉위하자 현덕왕후로 추존하고 능의 이름을 소릉(昭陵)이라 하였다. 현릉 정자각 그러서울우리파이낸셜
나 세조 즉위 후 단종 복위 사건에 어머니 최씨와 남동생 권자신이 연루되어 처형되면서, 현덕왕후 역시 폐위되어 종묘에 신주가 철거되고, 일반묘로 방치되는 수난을 당하였다. 그 후 여러 차례 복위론이 있었으나 무산되었다가, 1513년(중종 8) 문종 홀로 제사를 지내는 것이 민망하다는 명분으로 1456년(세조 2년) 폐위된 지 57년 만에 복위되었다 단종 복전복자연산
위 후 추승되어 종묘에 신주를 부묘하고, 사망 72년 만에 문종 옆 동원이강릉 형태로 천릉되었다. 천릉 시 묘시(卯時)에 개릉(開陵)하여 신시(申時)에 발인하였고, 내·외궁이 썩지 않아 바꾸었고, 새 재궁에 옷을 맞추어 염습을 하였다는 기록(중종실록 17권, 중종 8년 1513년 4월 18일)으로 보아 72년(1441년∼1513년)이 지났지만 재궁이 썩지 하나은행 새희망홀씨
않았고, 시신도 온전히 썩지 않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개릉(開陵)을 하고 수습을 하는데 무려 8∼12시간이 소요되었다는 것은 초장지가 결코 좋은 터가 아니라 목효지가 주장한 흉악한 땅이라고 볼 수 있다. 문종릉(전면) 농협은행 대출
야사(野史)와 경기도 안산시에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다. 세조가 단종을 죽이려 하자 현덕왕후가 꿈에 나타나 시동생인 세조를 꾸짖자 격노한 세조가 소릉을 파묘하여 관을 바다로 던져 버렸고, 바다에 던져진 왕후 관은 소릉 옆 바닷가까지 떠밀려 왔으나 아무도 관을 건져주지 않았고, 방치된 현덕왕후의 관을 어느 순박한 농부가 양지바른 곳에 묻어 주었다고 한다. 현덕왕후의 관이 바다에서 처음 도착한 곳은 뒤에 육지가 되었고 우물이 생겼다고 해서 관우물지[棺井址]라 전해지고 있으며, 관우물지 터에는 안산시에서 조성한 관우물 유래비가 있다. 경주대학교 특임교수·문학박사(풍수지리 전공)

Report this page